- 기우는 나라 황제의 고뇌 서린 덕수궁 -
10월 13일, 25명의 탐방 참가자들이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을 찾아서 덕수궁과 그 일원을 둘러보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에서 시작하여 정전이었던 중화문, 중화전 및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 그리고 을사늑약의 현장이었던 중명전을 방문하고 120년 전의 정국을 되새겨보다.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는데 처음에는 임진왜란 당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과 그의 후손이 살던 저택을 임시궁궐로 삼으면서부터, 그리고 조선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이다. 조선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고 그것은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의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가을이 성큼다가와 서늘하기까지 한 날씨에 처연한 과거사를 듣고 보자니 애잔한 마음을 거둘수 없었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한발 더 앞서고 배움을 늘려가는 것 아닌가? 오경자 교수님의 맛깔난 역사해설과 호젓한 산책 후 50년 전통의 메밀집에 들러 따뜻한 냄비국수를 먹으니 저절로 힘이 난다. 황제의 자존심을 보인 외전 정전인 중화전 천장의 용 문양이나 기단부 계단 담도에 새긴 용문양, 황색으로 칠한 창호등 대한 제국의 위상이 깃들어 있는 옛것들을 보라! 과히 아름답지 않은가?!